구도도 그렇고 호롱이 사진을 죄다 작게 찍어놔서 -_ㅜ
좀 속상했었다. 배경을 넣으려고 이렇게 했던걸까?;; 왜 이렇게 찍었는지 아직도 의아하다.
그나마 호롱이 얼굴이 나온 사진이 되겠다. 하지만 발이 또 짤렸다. ;;;
이날 비가 왔다갔다했고, 그나마 200짜리 써서 밝게 나왔는 것 같다.
이런날 사진 찍으면 많이 어둡게 나오는데 말이지.
45kg 호롱이
서울에 있는 동안 호롱이는 한국여성의 표준적이고(?) 이상적인 몸무게라는 수치를 달리고 있었다.
정말 다리며 팔이 나무가지 윽 호롱이 키가 167인가?
덕수궁 나와서 뒷돌담길 걷고,,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6만 1500㎡. 덕수궁이란 궁명(宮名)은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讓位)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定宗)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태종(太宗)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昌慶宮)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이라 하였다.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婷)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衛士)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1608년 2월 정침(正寢)에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역시 이곳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초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또한 창덕궁(昌德宮)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여 그의 재위(在位) 2,3년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기 전의 건축보다 더 훌륭한 법궁(法宮)을 이룩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 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1615년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네이버에서 퍼왔음.
생각외로 궁이 아름답다거나
심금을 울리는 그런게 안보여서 뭐..
호롱이랑 느작느작 걸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듯..
3번째 사진 맘에 든다~~^^